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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야(伽倻)철기문화의 영향
삼한시대의 변한(弁韓)의 모체로 건국된 가야는 고구려, 신라, 백제와 함께 강력한 왕국으로 발전해 나갔다. 가야 제국(諸國)은 다만 6개로 분할된 작은 왕궁으로서 통일 국가를 형성하지 못했지만 철기문화는 그 시대에 최고로 발달되어 있었다.
가락국의 다른 이름인 금관가야(金冠伽倻)는 곧 쇠나라(鐵國)라는 뜻이며 수로왕은 김해 철산을지배해 철왕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가야의 철광으로는 금관가야의 김해철산, 대가야의 야로철산(冶爐鐵山:합천군 야로),황산철산(黃酸鐵山), 척지산철산(尺旨山鐵山:산청군), 모대래 사철광 등이 있었다.
아라가야 주위에는 대곡철산(大谷鐵山), 창원철산(昌原鐵山)이 있었고 소가야의 고성(古城)에는천성철산이 철기 문화를 가져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기록상으로는 한국에 철기가 사용된 것은 고조선 이전부터였으나 고분에서 출토된 것은 서기전 4~3세기경의 것이 최초이다. 남진한(南辰韓)에서 철이 생산되었다는 사실이 중국《삼국지》위에 동이전에 기록되어 있다. 한반도에서 일찍부터 벼농사가 발달한 것은 철로 만든 농기구 덕분이며 철의 생산과철기의 사용은 벼농사를 크게 발달시켰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살던 사람들의 일부가 일본 열도로 건너가 철기문화의 벼농사를 전 일본에 전수한 결과가 되었다.
철기는 무기 제작의 재료이다. 그들은 이것으로 원주민을 철저히 유린하여 정복국가를 세웠다. 특히 가야시대의 도검의 제조술은 타국에 배해 매우 독보적인 면을 소유하고 있다. 따라서 후세에 가야가 쇠약해져 신라에 함락되어 가야의 철기문화, 즉 도검 제조술과 그 기법은 신라의 문화로 합류되어 삼국의 무예기술이 더욱 발전되었던 것이다.
경북 고령(高靈) 지산동32호 고분에서 출토된 갑옷과 어깨가리기는 가야시대의 찬란했던 철기문화의 정수(精秀)를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방어용 무구(武具)는 가야와 신라의 고분에서 출토되고 있는데 주로 가야 고분에서 출토되고있다.
또 투구와 고리자루칼, 손칼, 낫, 도끼 등은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 발굴되었으며 아라가야의 본거지였던 함안군 가야읍의 함안 군청 뒤 말산리 34호 고분에서 출토된 각각 63cm, 85cm 크기의 고리칼 가운데 85cm고리칼의 칼 등에는 〔上部先人貴乃刀〕라고 금실로 박아 쓴 7자의 글이 들어 있다. 가야의 유물 중 명문(銘文)이 들어 있는 유일한 유물이다.
김해시 주촌면 양동리 가곡마을 뒤 야산에서 발굴 조사된 양도리 고분군의 각종 철기 및 청동기등은 가야인의 그 문화의 계통 파악은 물론, 고대 이 시기 왜(倭)등과 교역하였다고 전한다. 이러한 것을 볼 때 가야의 철기문화는 동양에서 가장 발달되었다고 불수 있다.
또 발견되어 유물 가운데 소용돌이형 무늬 장식 환두대도는 가야시대 검술과 제작술의 독창적인 면과검 기술의 발전상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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